이성과 신념/대항해시대

대항해시대 - 정화의 원정

jhnambi 2022. 11. 9.

정화의 원정 상상도 (츨저 바이두)

 

1. 중국 해상 팽창의 정점 : 정화의 원정

정화의 대원정(1405 ~ 1433)은 중국내의 정치문제와 대외 정책을 포함한 큰 맥락에서 이해 할 필요가 있다. 명 건국 초기 황제는 안으로 절대주의 적 황제 체계 대외적으로는 명의 위엄을 세운다는 정책을 폈다. 영락제는 몽골고원과 베트남에 대군을 보내 승리하였고 티벳을 비롯 아시아 각지에 환관을 보내 제국의 질서를 확대했다. 정치문제론 견문제를 찾는 일이었다.

견문제는 제 2대황제였던 그는 강력한 군사권을 보유한 연왕에게 3년동안 치열한 전투끝에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 난다. 연왕이 바로 정화의 대원정이 시작된 영락제였고 견문제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도망차셔 해외쪽에서 병사를 모은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기때문에 영락제는 견문제를 찾아 죽이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

 

정화의 원정 스케일은 엄청나다. 연 27000명을 통솔해 18만 5000km 거리를 항해했다; (심지어 아메리카까지 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중 중심은 보선(서양보선, 서양취보선) 인데, 보물을 가지고 가는배, 지배자에게 전하는 황제의 하사물이라는 이름의 배이다. 최대 보선은 길이 150M 목 60M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다. 전투용으로는 매우 비효율적인 선박이기 때문에 항해 목적은 중국의 위용을 과시하는데 있을 것이다. 

 

- > 여기서 정화의 원정 목적은 대부분 중국의 위엄을 과시한다고는 설명하지만 그외에도 여러 이유로 추정되는데  아직까지 불가사의로 남아있다. 항해의 목적을 대충 정리해보면 아래 6가지로  예상된다.

 

  • 행방 불명된 전 황제 견문제 추적
  • 인도양 여러 지배자에게 중국 위용 과시
  • 중국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받기 위함
  • 이상한 동물을 비롯한 진기한 물건 및 대상 찾기
  • 이 지역 국가들의 세력 조사
  • 해도와 방위 조사

 

아직까지 정화 대원정의 정확한 원인이 나오지 않은 걸로 아는데 사실 중국과 인도양 사이에서는 이미 상품교환이 이루어 지고있어서 교역 장려가 목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인다. 중국의 정화 원정은 그럼 평화적이었을까? 물론 종교적 배타성을 가지고 폭력을 휘둘렀던 유럽과는 달리 중국은 문화적, 종교적으로 포용성을 보였다. 실론의 갈레에 세워진 비석은 정화가 평온한 항해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세운 비석인데 한자,타밀어,페르시아 어로 쓰여있다. 이중 한문에 기록된건 사원에 공양한 내용과 불교행사에 바친 품목들이 기록 되어있고 타밀어로 된건 중국 황제가 테나바라이 나야나르신을 찬양하고 있는 내용이 적혀있다. 페르시아어로 되있는 내용은 알라와 이슬람 성인의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여러 신들에게 중국 황제를 포함하여 찬양하고 예의를 갖추는 모습은 정화의 원정이 종교적 관용 및 실용성을 포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실론 갈레에 세워진 정화의 비석

 

그러나 꼭 정화선단이 비폭력적이었다고 말할 순 없다. 기록에 보면 해적선 10척을 격침시키기도 했고 해적대장 첸쥬이를 잡아서 참수하고 현지에서는 수천명을 살해한 기록이있다. 특히 3차원정에서는 실론 왕 알라가크나라가 정화선단의 배를 공격하자 군대를 동원해 국왕과 조신들을 나포해 난징으로 보냈다.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도 다음번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고 이지역 중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외교술, 실용성을 갖춘 원정이라 보인다. 원정 결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가 조공국이 되었고 이 당시 해상 강국 중 하나였던 자바 동부 마자파히트 제국은 중국에게 밀리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말라카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았는데 말라카는 중국을 등에 업고 이 지역 엄청난 강자가 되었다. (블로그 아시아 해양 세계 변화 글 참조) 이때 중국이 만약 해상으로 계속 뻗어나가고 해상 위주로 발전 방향을 잡았으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지만 중국은 정화원정 이후 해양을 포기하고 내륙으로 선회한다. 북방 이민족들의 위험과 농민봉기가 일어나서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는 남해 원정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 국가 전체의 무게 중심이 내륙으로 이동한건 베이징 천도에서 알 수 있다. 심지어 정화원정의 기록마저 없애려고 한 중국은 농업에 절대적 가치를둔 자기 충족적 고립주의로 나아간다. 유교사상도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면들이 조선 왕조 사상에 큰 영향을 준게 아닐까 싶다.

 

https://m.blog.naver.com/sdcsh/222113576635 (베이징 천도에 대한 이유 분석 상하이 신의 이슬님 블로그)

 

 

2. 중국의 해상 후퇴, 화교의 확산

 

중국의 중앙 정부는 비록 문을 닫았지만 민간인들의 해상활동은 갑자기 단절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의 지원이 사라졌기때문에 취약 할 수 밖에 없었는데 특히 이시대부터 강력한 후원을 받은 유럽상인들이 아시아로 들어오면서 유럽, 중국 상인들간의 뚜렷한 차이가난다. 해상 무역의 핵심은 네트워크의 유무가 결정 짓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유럽과 중국의 해상팽창의 차이는 국가가 적극 개입했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이 시대의 잘알려진 지금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교 공동체 로는 수마트라섬(자바 북동쪽 연안도 있음)의 팔렘방 이었다.해외 교역이 공식적으로 끊어지고 중국의 항구 도시들은 쇠퇴하거나 주요 활동들이 변화했다. 또 내륙 깊숙히 국내 무역이 발달하게 된다.(해외의 신 작물들이 중국의 여러지역으로 들어 오기도함) 그러나 중국 연안 지역 주민들은 기회가 닿으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이 중 큰 중국인 공동체가 형성된 마닐라, 나가사키가 있는데 이전에 중국 정부는 왜구를 격퇴에 엄청난 곤욕을 치른 후에 해금 정책이 해상에서의 중국을 약화 시켰다고 판단해서 1567년 해금 일부를 풀게 되고 이때 필리핀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넘어가는 길이 열렸다.

필리핀의 유명 화교 토니 탄 칵티옹

 

이 당시 마닐라를 살펴보면 마닐라에 1560-70년대에 에스파냐인들이 왔었을때 이곳은 경제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수준이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이곳을 쉽게 정복한뒤 중국과 교역하기를 원했고 중국인 상인과 선박의 도움이 필요했기때문에 중국인들을 끌어왔다. 그래서 30년정도만에 16-17세기 이곳에 가장 큰 화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럼 중국 정부는 해외 화교에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1574 - 75 년경 왜구는 마닐라를 정복하려고 왔다.(리마홍 선장) 이때 중국 관리들은 마닐라를 방문해 해적 진압만 얘기하고 화교 공동체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에스파냐인들에게 자체적으로 관리만 하라고 얘기한것으로 기록된다. 화교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국의 어떤 도움도 기대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1580년대 중국의 견직물 교역이 크게 증가하면서 중국인들의 세력이 과도하게 커지자 에스파냐인들과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1603년 이지역의 중국인 대부분들이 살해당했다. (기록에 의하면 25000명에서 500명가까이 수가 줄었다고한다) 그 후 푸젠성 주민들이 필리핀으로 가게되고 현지에 정착하는 중국인들이 늘어서 20년이 채 안되서 3만명의 화교가 생겨났다. 하지만 본국과의 연결이 되지 않고 필리핀 현지에 동화되어가면서 똑같은 비극이 일어나 1639년에는 중국인 2만명이 학살당했다. 이를 방치하는 중국정부와 마닐라 왕권의 후원을 받는 에스파냐인들, 국가의 지원을 받는 동인도회사 이들의 차이가 중국인들의 학살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강력한 군사력 종교적 힘을 받은 에스파냐인들, 쇼군과도 담판짓는 네덜란드인들이 중국인들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중국상인들은 그들 스스로가 제한된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체제를 운용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체제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화 원정 이후 중국의 전세계의 바다로 나아갈 가능성은 사라졌다. 결국 중국이 아메리카나 유럽으로 간게아니라 유럽이 아시아의 바다로, 세계 해상 네트워크를 연결시킨건 결국 서유럽 국가들이 되었다.

댓글